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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8 헌책에 적힌 편지 (30) - 박승민(풀칠아비)

헌책에 적힌 편지

가끔 헌책방을 찾는다. 어쩌다 절판된 도서들 중에서 보물을 찾는 행운을 기대할 수도 있고, 근처에 괜찮은 헌책방이 생겼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가장 큰 이유야 당연히 주머니 사정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제 우연히 한 헌책의 표지 안쪽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발견하였다.


이 편지를 읽으시는 당신은 분명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괜찮으면 살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오.

나도 여기에 이렇게 낙서하면 헌책방과의 가격협상에 불리하다는 것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몇 마디 전하고 싶어 이렇게 펜을 들었소.

나도 헌책방을 자주 이용하지만, 가끔은 책을 보며 꺼림직한 생각이 들 때가 있었소. ‘전 주인은 어쩌다가 책까지 팔게 되었을까? 전 주인의 경제적 박복이나, 읽지도 않을 책을 사는 경솔함이 책에 딸려 오는 것은 아닐까?’하며 말이오. 바보 같은 생각 아니겠소. 인쇄소에서 똑같이 찍히는 책인데, 특별히 재수 없는 것이 어디 있겠소. 그저 버림받은 불쌍한 책으로 봐주길 바라오.

그래도 꺼림직함이 행여 가시지 않을까 하여 이 책이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를 밝히는 바요. 굳이 따지자면 이도 나의 경제적 박복 때문이라 하겠지만, 이 책은 그저 더 이상 보관할 장소가 없어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이오. 폐품으로 버려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책이기에, 그래도 누군가 다시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여기에 내놓게 된 것이오. 그리고 이 책이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서 뒤쳐져서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아님을 아울러 밝히오. 단지, 아직 제대로 읽지 않은 다른 책들이 많이 있어서 그렇다고 이해해주기 바라오.

나는 책을 처음 읽을 때, 되도록이면 밑줄을 긋지 않소. 왜냐하면 다음에 읽을 때, 생각이 그곳에만 머물러 다른 것을 놓칠까 두렵기 때문이오. 그런 위험을 당신에게 떠넘기면 안될 것 같아 밑줄들은 되도록이면 찾아서 지웠소. 굳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알고 싶다면 그 흔적을 찾아보기 바라오.

그리고 이미 표지 안쪽에 내 이름이 그대로 적혀있는 것도 보았을 것이오. 영원히 함께 할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이름을 적은 것도 나였기에, 차마 내 손으로 직접 지울 수가 없었소. 이름이야 새로 주인이 된 당신의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소. 혹시 아오? 내가 유명인이 되어 이름과 편지가 적힌 이 책이 당신에게 뜻밖의 행운이 될지도.

아무쪼록 여기에 버려졌다 이 책을 꺼림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잘 읽고 아껴주기 바라오. 당신의 앞날에 늘 행운이 함께 하길 …


벌써 정말 이런 편지가 적힌 헌책이 있었냐고 묻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솔직히 아니다.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혹시 아는가? 오늘 헌책방 가면 그런 책 만날 수 있을지도 …

2009/10/28 10:14 2009/10/2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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