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에 적힌 편지

가끔 헌책방을 찾는다. 어쩌다 절판된 도서들 중에서 보물을 찾는 행운을 기대할 수도 있고, 근처에 괜찮은 헌책방이 생겼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가장 큰 이유야 당연히 주머니 사정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제 우연히 한 헌책의 표지 안쪽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발견하였다.


이 편지를 읽으시는 당신은 분명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괜찮으면 살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오.

나도 여기에 이렇게 낙서하면 헌책방과의 가격협상에 불리하다는 것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몇 마디 전하고 싶어 이렇게 펜을 들었소.

나도 헌책방을 자주 이용하지만, 가끔은 책을 보며 꺼림직한 생각이 들 때가 있었소. ‘전 주인은 어쩌다가 책까지 팔게 되었을까? 전 주인의 경제적 박복이나, 읽지도 않을 책을 사는 경솔함이 책에 딸려 오는 것은 아닐까?’하며 말이오. 바보 같은 생각 아니겠소. 인쇄소에서 똑같이 찍히는 책인데, 특별히 재수 없는 것이 어디 있겠소. 그저 버림받은 불쌍한 책으로 봐주길 바라오.

그래도 꺼림직함이 행여 가시지 않을까 하여 이 책이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를 밝히는 바요. 굳이 따지자면 이도 나의 경제적 박복 때문이라 하겠지만, 이 책은 그저 더 이상 보관할 장소가 없어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이오. 폐품으로 버려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책이기에, 그래도 누군가 다시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여기에 내놓게 된 것이오. 그리고 이 책이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서 뒤쳐져서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아님을 아울러 밝히오. 단지, 아직 제대로 읽지 않은 다른 책들이 많이 있어서 그렇다고 이해해주기 바라오.

나는 책을 처음 읽을 때, 되도록이면 밑줄을 긋지 않소. 왜냐하면 다음에 읽을 때, 생각이 그곳에만 머물러 다른 것을 놓칠까 두렵기 때문이오. 그런 위험을 당신에게 떠넘기면 안될 것 같아 밑줄들은 되도록이면 찾아서 지웠소. 굳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알고 싶다면 그 흔적을 찾아보기 바라오.

그리고 이미 표지 안쪽에 내 이름이 그대로 적혀있는 것도 보았을 것이오. 영원히 함께 할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이름을 적은 것도 나였기에, 차마 내 손으로 직접 지울 수가 없었소. 이름이야 새로 주인이 된 당신의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소. 혹시 아오? 내가 유명인이 되어 이름과 편지가 적힌 이 책이 당신에게 뜻밖의 행운이 될지도.

아무쪼록 여기에 버려졌다 이 책을 꺼림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잘 읽고 아껴주기 바라오. 당신의 앞날에 늘 행운이 함께 하길 …


벌써 정말 이런 편지가 적힌 헌책이 있었냐고 묻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솔직히 아니다.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혹시 아는가? 오늘 헌책방 가면 그런 책 만날 수 있을지도 …

2009/10/28 10:14 2009/10/2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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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ig-bite 2009/10/28 10:43

    헌책방에 나오는 책도 정말 여러 가지 사연이 있겠네요. "왜냐하면 다음에 읽을 때, 생각이 그곳에만 머물러 다른 것을 놓칠까 두렵기 때문이오." 이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네요. 요즘처럼 빨리 요점만 뽑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아는 척해야 하는 세상에서는 내가 친 밑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준 요약본에라도 손을 내밀는 것이 허다하니까요.

    • 박승민 2009/10/28 10:55

      헌책방에 가면 정말 멀쩡한 새책도 많이 있고. 선물이라고 편지가 적힌 책도 가끔 눈에 띄기도 하고 ... 그 사연이 궁금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2. 뽀글 2009/10/28 11:08

    저 아는분도 헌책방 자주 이용하시는데 정감가고 좋다네요..

    • 박승민 2009/10/28 11:18

      저도 혹시나 좋은 책 싸게 만날 수 있을까하여 가끔 찾아갑니다.
      오래된 책 냄새도 좋아하고요.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3. 바람노래 2009/10/28 11:27

    아, 밑줄을 긋지 않는 이유가 저랑 비슷하군요.
    저도 종종 헌책방을 애용합니다.
    엊그제 간만에 헌책방을 가니...왠지 설레더군요 ^^

    첫사랑에게 보내는 편지가 적힌 것도 예전에 발견했던 기억이 있군요.ㅎ

    • 박승민 2009/10/28 11:29

      헌책방 가면 그런 재미가 있더라구요.
      모르지요? 혹시 책사이에 숨겨진 비상금을 발견할 수도...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4. Raymundus 2009/10/28 12:57

    처음 글을 보면서 흥분을 했었습니다..정말 일어난 일이었다면 ^^

    편지의 내용에 박승민님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거 같아
    한편 더 다가설 수 있는 포스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박승민 2009/10/28 13:50

      책 한권과의 인연마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을
      책을 매개로나마 만나고 싶은 욕심에 적어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5. 드자이너김군 2009/10/28 16:11

    예전에 중고차를 샀는데, 거기에 전 주인분이 남긴 정성스런 메모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 요즘은 헌책방도 찾기 힘들던데..
    저런 편지가 담긴 책을 한권 사게 된다면 정말 기분이 좋겠습니다.

    • 박승민 2009/10/28 16:20

      그런 메모가 담긴 중고차가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자신이 타던 차에 깊은 애정을 가지시는 분들도 많지요.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6. monocoq 2009/10/28 16:58

    아 정말 저런 편지가 한 통 있었으면 너무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책값이 부담되어 거의 사지 않고 지인들한테 빌려읽거나 서점에가서 읽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끔 헌책방이라도 가봐야겠내요. 정말 저런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며. ^^

    • 박승민 2009/10/29 00:01

      사실 오늘 아침의 생각과는 달리 헌책방에 가질 못했습니다.
      내일부터 서둘러 헌책방을 돌아다녀야겠습니다. monocoq님께서 그런 책을
      먼저 발견하시기 전에 말입니다. ㅎㅎㅎ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7. Phoebe 2009/10/28 19:50

    다 읽고난 후에야 속았다라는걸 알았소.^^
    저정도의 글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대단한 문인이 될것 같으니
    잘 간직하길 바라오.^^

    • 박승민 2009/10/29 00:10

      아이고, 속여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끝에서라도 이실직고 하였으니 , 너그러운 용서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8. 내영아 2009/10/28 20:00

    ㅋㅋㅋ... 풀칠아비님이 그런 편지를 쓰셔서 헌책방에 책을 파는거에요. 받는 분이 블로그에 풀칠아비님과 같은 글을 올리실지 몰라요.

    • 박승민 2009/10/29 00:26

      한번 정말로 그렇게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ㅎㅎㅎ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9. 펨께 2009/10/29 03:49

    언제 기회가 된다면 헌책방 샅샅이 뒤져봐야 겠습니다.
    혹시 풀칠아비님 사인이라도 남겨져 있을지...ㅎㅎ
    예전 책에 밑줄을 많이 그었는데 하면 안되는거네요.

    • 박승민 2009/10/29 10:21

      정말 헌책방에다 책을 좀 팔아야 겠네요. ㅎㅎㅎ
      저도 책에 밑줄을 많이 긋씁니다. 다만, 가급적 책을 처음 읽을 때는 긋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10. 모모군 2009/10/29 09:03

    나도 헌책방 한번 가볼까.. 하고 생각 들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

    • 박승민 2009/10/29 10:26

      오늘 헌책방 돌아다니면 모모군님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겟네요. ㅎㅎ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11. 바람꽃과 솔나리 2009/10/29 14:54

    멋있는 반전으로 끝을...^^
    매력적인 글들에 은근히 빠져 듭니다.

    • 박승민 2009/10/30 11:07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반전이라.. 오늘은 ...
      픽션조차 사실로 받아들이시는 착한 분들이 많으셔서,
      끝에서나마 이실직고 하였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12. 보시니 2009/10/29 17:26

    아, 풀칠아비님... 나이트샤말란도 아니고 반전의 대가..ㅋㅋ
    삶의 철학이 엿보이는 글이네요~

    • 박승민 2009/10/30 11:14

      나이트 샤말란이 누군가 했더니, 영화 식스 센스를 만든 감독이셨군요.
      식스 센스, 정말 대단한 반전이 있었지요.
      어찌 제가 감히 그 분과 ...
      본의 아니게 가끔 반전이 나오고 있을 뿐입니다.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13. 이야기손 2009/10/29 21:06

    30년 이상 끌고다닌 책 때문에 방마다 책장으로 가득하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적당히 정리좀 할 걸 싶어요.
    이젠 정리를 할래도 헌책 집에는 못갈 것 같아요.
    그래도 책을 살땐 심사숙고해서 샀는데...
    한 번 보고 말 책은 사지 않는게 제 신조였거든요.
    그런데도 이젠 저 책들이 짐이되네요.
    ㅋㅋ
    저도 헌책방 무지 좋아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박승민 2009/10/30 11:27

      저도 책 정리 잘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싶은 책도 솔직히 버리기에는 뭔가 꺼림직해서 말입니다. 이야기손님께서도 헌책방 좋아하신다니, 언젠가 헌책방에서 만날지도 ...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14. 유리 2009/10/29 21:43

    밑줄을 긋지 않는 방법...
    저 같은 경우는 작은 포스트잇을 붙여서 감명 깊었던 곳을 기억해놔요^^

    정말 저런 편지가 써진다면 +_+

    • 박승민 2009/10/30 11:32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저도 한번 이용해봐야겠습니다.
      정말 저런 편지가 적힌 헌책이 있다면, 저는 일단 사고 보겠지요. ^^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15. mark 2009/10/29 21:53

    재미있는 한장짜리 꽁트였구만요. 설정을 잘 했습니다. 앞으로 글로 나가도 될듯하네요.

    • 박승민 2009/10/30 11:38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부족한 글 재미있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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