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무용담 #3 - 투사의 아침 열기

전화를 끊으면서, 스스로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출근시간은 많이 지나버렸지만, 어차피 조금 늦을 것을 각오했던 것 아닌가? 위기도 없지는 않았다. 예정 방문시간을 지나 콜센터로 전화했을 때,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당장 작동은 하니까 늦어져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 않느냐는 상담원의 말에 하마터면 폭발할 뻔했다. 말로 하는 전투에 대한 나의 지론 중 하나가 ‘먼저 목소리 높이는 놈이 진다.’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질 뻔했다. 담당 수리 직원으로 하여금 바로 전화하게끔 했다.

집을 나와 버스를 탔다. 그때까지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외워둔 콜센터 상담원의 이름을 메모하며 다음 전투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담당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고 상대방이 자기 소개를 하는 동안, 반사적으로 이 사람이 내게 어떤 카드를 내밀까 생각해보았다. 기껏해야 너무 늦게 연락을 받았다거나, 일이 많이 밀렸다는 것 아니겠는가? 간단한 사과 발언 후, 예상대로 당당하게 일이 너무 많이 밀려서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여기서 상대방이 내민 카드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택하는 전술이다. 행여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군의 출혈 또한 각오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미리 생각해보고 전화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어차피 수리하면서 대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저도 그런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라고 최대한 정중하게 운을 띄웠다.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분명한 어조로 또박또박 얘기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못 오면 못 온다고 전화는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다리다가 지금 출근합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드디어 여기저기 다른 부서 핑계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긴 사과가 나온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짧게 한마디 더했다. 저녁 아무리 늦게라도 시간만 알려주면 그때 와서 고쳐주겠다고 했다. 시간을 알려주고 전화를 끊기 전에 혹시 변동상황이 있으면 핸드폰에 찍힌 번호로 연락하면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나 당신 핸드폰 번호도 알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정도면 분명 저녁에 그리고 제시간에 찾아올 것이다.

나날이 커져가는 나의 전투력에 스스로 감탄하다, 문득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매일매일 투사로 만들어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왜 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오늘 저녁에는 30분 배달 보장 된다는 피자를 시켜먹어야겠다. 시간 정해 놓고 배달 보장해주는 이유가 맛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 그 의도는 다르다지만, 여하튼 깔끔하지 않은가? 늦으면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준다니 말이다.
2009/10/23 11:08 2009/10/2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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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뽀글 2009/10/23 11:43

    보상.. 그만한 책임감있이 하니 나쁘다고 생각하진않아요..^^ 오늘도 투사에 하루를 시작하네요~ 너무 목소리 깔지마시고요 가끔 웃으면서요^^화이팅

    • 박승민 2009/10/23 11:48

      목소리 자주 깔지 않습니다. ㅎㅎ
      말씀대로 많이 웃는 하루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뽀글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2. dramatique 2009/10/23 12:15

    FM 이론은 그렇지만 말이란게 감정따로 말따로 되기 쉬운게 아니라서,
    산에 몇년 갔다온 도사 넝구렁이가 아닌담에야 전투형으로 바로가기가 더 쉽고,누가하나 깨지던지 빨리 끝장나는게 쉽지요..

    • 박승민 2009/10/23 12:18

      ㅎㅎㅎ
      진정으로 이기기 원하신다면, 넝구렁이라도 되어야 ....
      맞습니다. 저도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3. Phoebe 2009/10/23 12:23

    ㅋㅋㅋ 피자 배달 시켜놓고 시간을 재고 계셨겠군요.^^
    나 당신 핸드폰 번호도 알고있음을 강조...요 부분에 줄긋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박승민 2009/10/23 12:31

      어떻게 아셨나요? 요즘은 웹으로 주문하면, 화면에 남은시간도 나오는 것 같더라구요.
      ㅎㅎㅎ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4. 바람꽃과 솔나리 2009/10/23 12:34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ㅎㅎ
    매일이 어쩌면 전투상태이지요...
    먼저 목소리 높이면 진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

    • 박승민 2009/10/23 12:46

      ㅎㅎㅎ
      바람꽃과 솔나리님의 전투 없는 하루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5. 보시니 2009/10/23 13:08

    오,,, 저는 누군가와 부딪히면 항상 상대방 페이스에 말리는 경향이 있는데,
    풀칠아비 님께 비기를 배워야겠어요.ㅎㅎ

    • 박승민 2009/10/23 13:16

      ㅎㅎㅎ 수강료 많이 들고 찾아오세요...
      수강료 먼저 밝히는 사람한테 배울것 없다는 것 아시지요?
      고맙습니다. 전투 없는 날들만 이어지길 바랍니다.

  6. 내영아 2009/10/23 15:30

    때로는 이런 모습도 필요하죠.
    아니면 주객이 전도될수가 있어서...

    상황에 맞게 대처하신거니... ^^ 잘하셨어요.

    • 박승민 2009/10/23 16:38

      중요하지 않는 일에도 투사로 살아야하는 날들이 싫어서 적어보았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7. 펨께 2009/10/24 02:39

    저도 좀 배워야겠습니다.
    근데 수강료없이 공짜로...ㅎㅎ
    투사 되기를 원하는 분들 모두 이곳으로 오세요 라고 소문 좀 낼까요?ㅎㅎ
    좋은 주말 되세요.

    • 박승민 2009/10/24 08:17

      ㅎㅎ 큰 일 났네요.
      말 뿐이란는 것 완전히 들통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8. mark 2009/10/24 22:25

    끝까지 참을 성있게 해냈나보죠? 하기서 먼저 화를 내면 지기 쉽죠. ㅎㅎ
    그런데 나는 그런 경우 화부터 내려고 하니..

    • 박승민 2009/10/24 08:27

      저도 아직은 그럴려고 노력만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쉽지가 않네요.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9. 비바리 2009/10/25 10:00

    오`~~
    한 수 배웁니다..
    일단.. 상대방 배려멘트 날리고...

    저 같으면 따따따`~~했을거에요..
    ㅋㅋ

    • 박승민 2009/10/25 12:05

      저도솔직히 바로 따따따 하는 경우가 많지요...
      고맙습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10. 블루버스 2009/10/25 16:45

    와 정말 잘 해결하셨네요.
    저도 이런 일 있으면 나름 준비잘해서 차분히 대결모드에 들어가는데
    이분들 보통이 아니더라구요. 다들 이런 .일에 익숙한 분들이라...ㅋㅋ
    적당히 양보하면서 받아내야죠.^^;

    • 박승민 2009/10/25 20:23

      그분들은 또 그게 그분들의 삶이니까요.
      모두다 서로서로 양보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남은 휴일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11. Raymundus 2009/10/25 22:42

    풀칠아비님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맛깔나게 써내려가신 이야기들에 미소도 짓고 고개도 끄덕이고 있습니다.
    들러주셔서 감사드리고 좋은 경험,즐거운 상상, 사는 이야기 자주 들으러 오겠습니다.

    • 박승민 2009/10/26 10:35

      반갑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글 읽으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

  12. 시림, 김 재덕 2009/10/26 11:34

    ...........*^l^*...........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삶은 정말
    전쟁으로 표현 되기도 해요
    한편에 쪼개어 놓은 시간은 분명히
    나에게는 귀하고 소중하기에...
    예전에는 목소리 크면 이겨도 지금에 현실에서는
    목소리가 크면 진다는 말이
    결코 외람된 이야기는 안닐것이예요
    다시 생각을 하고 살자란 말로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행복은 곁에 있어요
    사랑으로...
    기다림에

    • 박승민 2009/10/26 16:24

      너무나 좋은 댓글에 감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행복은 곁에 있어요.'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13. 유리 2009/10/26 19:34

    믹시 버튼이 휙 돌아가 있어서 추천을 못했네요 ㅋㅋ

    이탈리아도 좀 비슷해요
    와서 고쳐주는 사람 맘이에요 ^^

    • 박승민 2009/10/26 20:18

      이상하게 믹시 버튼에 등록되지 않은 글이라고 나오네요.
      믹시 사이트가면 제대로 나오는데 말입니다.
      추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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