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돼지가 보낸 편지

발신인이 3574라고만 적혀있는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아직 답장을 쓰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무 돼지입니다. 굳이 이름을 따지자면 귀에 적힌 3574정도가 될 것 같네요. 당신이 이 편지를 특히나 돼지에게서 받았다고 해서 당신이 선택 받은 사람이란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단지 아무 사람에게 무작위로 보내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냥 재수 없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편지에 당연히 있어야 할 날씨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재수 없다 생각하라고 해서 너무 짜증내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빨리 맛있는 90Kg이 되기 위해 좁은 비육실에 갇혀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당신에게 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냐고 묻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너무 가식적으로 보일 것이 분명하니까요.

비육실에 갇혀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다 보니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슬프지만 내가 태어난 이유와 죽을 이유는 맛있는 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죽는 길인지 알면서도 주는 사료 남김 없이 꾸역꾸역 먹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역시나 돼지처럼 잘 먹는다고 얘기를 하지요, 맨날 똑 같은 사료 주면서 말입니다. 저희도 잘 알고 있답니다. 이것 많이 먹으면 빨리 죽고, 세상에 더 맛있는 음식도 많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열심히 먹을 뿐인데 …

어느 날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사료를 가져다 주는 당신들은, 우리들의 삶을 먹고 있는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나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답장을 받으려면 체중을 90Kg이하로 유지하고 있어야 하므로 나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행여 나쁜 주인이 눈치라도 채면 물로 나머지 무게를 채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정말로 싫거든요. 당신의 빠른 답변을 갈망합니다.

아무 돼지 3574로부터

2009/08/10 11:41 2009/08/10 11:41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ig-bite 2009/08/10 12:30

    아무 돼지 이야기라...지난번 공룡 이야기만큼이나 신선한 비유입니다. 세상의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로부터 뭔가를 제공받는 우리네들은 정말로 무엇으로 하루하루 살아갈까요? 어 근데 글에서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나요? 하고 하네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지...

    • 박승민 2009/08/11 10:47

      공룡이야기까지 기억해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2. 영웅전쟁 2009/08/10 20:33

    아!!!

    아프군요.....

    인생의 깊이를 느끼고 갑니다.

    • 박승민 2009/08/11 10:49

      매번 과찬을 남겨주시네요 ...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3. 네포무크 2009/09/22 23:39

    삶의 의미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입장바꿔서 사람이 돼지에게 사육된다면, 먹히기 위해서 사육된다면 겸허해 질 수 있을까요?
    이럴때라도 사람들에게 양분을 주는 모든 생물들에게 잠시나마 미안해 하고 감사해야 할거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

    • 박승민 2009/09/23 00:08

      아. 미처 생각 못해봤던 문제입니다. 과연 겸허해질 수 있을까요?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4. 유리 2009/09/25 21:56

    돼지를 저렇게 가둬두고 그 고기가 정말 맛잇을지도 의문이지만.. 그 전에 도축 방법을 보니..잔인하게 죽이는 경우가 많더군요...ㅠ.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 박승민 2009/09/25 23:08

      저도 사실 돼지고기 좋아하는데, 잔인한 도착 방법 말씀하시니 새삼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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